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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빛, 연결되지 않고 지극히 어두워야 보이는 그 순간의 에너지, 빛의 편린들. 그 작은 빛이라도 반복되면 반짝임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빛이란 원래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높은 법이니까. 그런 찰나의 순간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제목인 < 쇼토라이토>는 영어의 일본식 발음을 한국어로 적은 것으로, 한글로 ‘짧은 빛’이라 쓸 수 있지만, 한때 일본에 적응하려고 애쓰던 작가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있어 일부러 일본에서 외래어의 발음을 표기하는 방법인 카타카나이제이션(Katakanization) 형식을 빌렸다.

이번 전시는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으로 전개되었다가 사라지는 ‘공중요리법’을 메인으로 일본에서 연을 맺은 부토 무용가 ‘김상’과의 협업작업인 ‘하지만 희붐한 춤사위’의 영상작품 등을 선보인다. 일본에서 살았던 작가의 한때가 다분히 녹아있는 작업을 통해 예술과 문화의 다양성을 탐험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그 짧은 순간의 빛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감정의 표출에 있다기보다 정제하고 억누르고 반듯하게 하고 그 후 작은 비틀림을 표현한다.
그마저도 3d로 가면 쉽지 않아진다.

내가 나만의 도피처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보통 나는 나를 잘 잃는다.
사람들을 만날때도 SNS를 할 때도 눈치를 많이 본다.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며.
안타깝게도 눈치를 많이 봄에도 눈치가 반쯤 없어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지만
그럼 또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은 아마 어려서 베인 습관이다.

오랜시간 나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맸다.

작가노트
어딘지 모를 이곳에서 우리 모두 함께 춤을 춰보자.
흥겹게 아니 슬프게, 힘차게 아니 얌전히.
사실 가만히 있어도, 머뭇거려도 좋다.
내가 너를 위로할 테니. 아니 네가 나를. 나를 내가.

중간계에서 일어나는 나의 장례식 혹은 제삿날 아니면 아무 날의 즐거운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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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공백이 생기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이미지는 결코 두려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자 오롯한 마침표이기 때문에 늘 골똘히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문명화된 사회일 수록 죽음은 점점 일상에서 유리되는 경향이 있어 죽음이란 극적으로 터부시되거나 혹은 신성시 된다. 큰 충격과 슬픔의 이미지로 끝내기엔 죽음이 퍽 서운해 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제사상을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게 차려보았다. 너에게, 나에게 모두에게 오는 죽음에 대해 조금은 귀엽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 모두 함께 마주하고 즐겨보자는 의미에서 작업하였다.

이미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다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에 대해 이미지이고,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이토록 자연스럽고

예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길 거리껴 하지 않았다. 삶의 한 순간이자 자연스러운 생의 마침표에 대한 이야기는 안타까울 수는 있어도 두렵거나 무섭거나 피하고 싶은 사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명이 고도화 되면서 죽음은 사회에서 격리되고 대화에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되었다. 삶의 한 순간이자 자연스러운 생의 마침표에 대한 이야기는 안타까울 수는 있어도 두렵거나 무섭거나 피하고 싶은 사건은 아니었다. 하여 나는 우주의 제사상을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게 차려보았다. 너에게, 나에게 모두에게 오는 죽음에 대해 조금은 귀엽게 마주해 보자는 의미에서 작업을 하였다. 두려움의 무게를 덜고 죽음이 포함되어 있는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에.
유명한 라틴어 문장인 메멘토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역설적으로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인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의 목표 중 하나는 죽음과 그 과정을 연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란 책이 있다.
예전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리낌없이 하는 편이었다.
삶의 한 순간이자 마침표인 죽음에 대해 별 거리낌없이 이야기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문명이 고도화되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무섭고 터부시되고 생활에서 유리되었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이야기는 늘 겸손하며

작가는 중간계라 명명한 공간에서 한
제사, 무덤,
죽음을

※ 작가 노트
어딘지 모를 이곳에서 우리 모두 함께 춤을 춰보자.
흥겹게 아니 슬프게, 힘차게 아니 얌전히.
사실 가만히 있어도, 머뭇거려도 좋다.
내가 너를 위로할 테니. 아니 네가 나를. 나를 내가.

생각의 공백이 생기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나에겐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이미지는 결코 두려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자 오롯한 마침표이기 때문에 늘 골똘히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죽음은 점점 일상에서 유리되는 경향이 있어 죽음이란 극적으로 터부시되거나 혹은 신성시된다. 큰 충격과 슬픔의 이미지로 끝내기엔 죽음이 퍽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제사상을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게 차려보았다. 너에게, 나에게 모두에게 오는 죽음에 대해 조금은 귀엽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 모두 함께 마주하고 즐겨보자는 의미에서 작업하였다. 그렇게 삶은 풍성해지길 바라며.

무채색의 캐릭터와 알록달록한 배경으로 현실의 비루함을 팝이라는 이름의 포장으로 잘 싸아 한 공간에 잡아넣는다.
무채색의 고양이는 일상의 위로로 존재한다.

귀여운 공격성이라는 말이 있다. 귀여운 존재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깨물고 싶거나 망가트리고 싶어하는 충동을 느끼는 현상으로, 과도하게 행복한 상태에서 감정의 평형을 맞추기 위해 정반대의 공격성을 유도하는 행동이다. 작가의 작업에 나타나는 귀여움은 그 반대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좌절과 공포의 평행을 맞추기 위한 귀여움으로 무채색의 고양이는 알록달록한 배경과 함께 현실의 비루함을 팝적인 포장지로 잘 싸아 한 공간에 잡아넣는다. 그 껍질이 벗겨지지 않길 바라며.

팝아트로 분류된다.

술을 마시면 대리를 이용하는데 보통 짧은 거리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인천에서 미팅이 있어 2번 정도 대리를 부르면
인천에서 하남까지는 거리가 있기도 하고 대리기사님이 이 먼 곳까지 와서 궁금해 한 것인지 인천분들은 원래 친근하신지 모르겠지만
오는 길에 쉬지않고 대화를 하게 되는데 보통 퇴근하시려다 콜이 떠서 바로 잡았다부터 자식자랑까지 하시고 나는 전시를 하게 되어 미팅을 합니다라고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보면 전시회에 초대를 한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전시초대를 하고 있다.

진짜로 오시면 재밌겠다라고 생각했다.

이 광고만 문제가 아니다. 부모나 보호자 그리고 교육자들이 남아는 기대를 투사해 행동으로 칭찬하고 여야는 기대를 투사하지 않고 타자화된 외모로만 칭찬하는 것,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여아에게 타자화된 예쁨을 강제하는 독약 같은 문화 그 자체를 타파해야 한다.

쥐쥐라고 읽고 게임계에서는 Good Game이란 뜻으로 게임이 끝났을때의 인삿말로 쓰인다.

언어의 불완전성을 이용한 작업으로 반복되는 패턴의 안정적인 형태에 불완전한 글자라는 재료를 조합하여 질서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 불완전하고 불안한 ‘나’에 대한 이야기.

일본의 金景雲(Kim Keiun) 부토(舞踏) 무용가와의 콜라보레이션
그 후 몇 년간 서로의 공연과 전시를 보며 응원하다 올해 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완성작은 7월과 9월 전시장에서 만나요.

무용 장르는 부토인데 부토ぶとう(舞踏) Butoh란 ‘일본의 전통 예술인 노[能]와 가부키[歌舞伎]가 서양의 현대무용과 만나 탄생한 무용의 한 장르이다. 아방가르드의 면모를 띠어 문화적 화려함을 멀리하면서 징그럽고 흉물스러운 육체로 춤을 춘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만이 미가 아니라는 무용 의식의 확장을 의미한다.’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쓰여있지만 네이버 일본어 사전엔 무도(舞蹈)와 무답(舞踏) 모두 춤으로만 되어있다. 야후재팬에서 이미지 검색을 하는 편이 이해가 쉽다.

그 움직임이 ぶとう(舞踏)라는 일본 무용의 한 장르이고 죽음의 춤이라고 설명하셨다.

몇년 후 선생님을 찾아 콜라보를 제안하고 작품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거기에 맞는 퍼포먼스를 만들어주시고 영상을 찍어오고 나 또한 그 위에 나의 해석을 얹어 또 다른 움직임을 만들고 있는 와중.

ぶとう를 검색 하니 무도(舞蹈)가 나와 내가 일어가 서툴러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으나 얼마 후 다시 찾으니 한국어 사전에서 무도(舞蹈)와 무답(舞踏) 둘 다 ぶとう로 무도, 춤으로 번역해 놓아서 생긴 일인데 영어사전에 Butoh가 등재되어 있는 것도 확인. 사실 내가 잘못 이해했다 한들 작품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와 내가 서로 작업으로 대화하고 응답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냄이 중요한 것이기에.

철학이나 의미의 오용이 이미지를 작업하는 이에게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생각에 이르렀다가 다시 한번 찾아보니 처음에 들은 것이 맞았다.
재해석의 재해석의 재해석의 작업은 그리 즐겁게.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은 이리 흘러가도 좋지 않을까. 혼나려나?

캔버스와 생지를 왔다 갔다 하다가 생지로 갔고, 두껍고 거칠게 그림을 그리는 윌럼 드쿠닝이야 바른 캔버스를 주로 썼지만, 헬렌 프랑켄탈러는 생지 그대로의 거친 캔버스를 활용했고, 말년의 김환기도 마찬가지였다. 김환기는 눕혀놓고 그릴 때 캔버스의 가로지지대가 그림에 배겨나왔으므로, 나중엔 무게 분산을 위해 가로지지대를 더 추가했다. 자연스러운 발색을 중시했던 마크 로드코는 캔버스천에 아교만 먹이고 백색 프라이머는 입히지 않았다. (대신 아교에 가루 안료를 섞어서 톤을 조절한 경우가 많다.) 애그니스 마틴은 아교 먹인 캔버스에 석회가루 등을 섞은 수성 물감을 발라 지지체를 준비했다.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화면은 그냥 선만 그어선 나오지 않는다.
회화적 회화를 추구하는 경우라면, 굳이 티타늄 화이트가 섞인 젯소를 바른 캔버스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건 재현 회화를 위한 지지체다. 재현 회화를 다루는 경우에도 백색 화면에 그리는 경우보다, 추후 완성될 그림에 맞춰 회색조의 입히고 그리는 경우가 많다. 과정이 드러나는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그 장단점을 잘 이해할 것이다.
전업화가라면, 자신에게 특화된 캔버스 타입 몇 가지를 정해놓고 애용하기 마련이다. 남들은 모르는 표징을 숨겨 훗날의 진위 감식을 도모하기도 한다. 특수 제작한 캔버스라면, 위작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하지만, 국내엔 색소가 포함된 방부제를 먹이지 않은 잘 건조된 캔버스 스트레처용 목재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얼핏 원목 같아도 다 화학적 처리가 돼있다. 캔버스 제작 업체들은 아예 그런 고급 목재는 수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젖으면, 목재에서 방충 성분을 포함한 갈색 색소가 녹아나오며 캔버스(천)을 변색시킨다. 틀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따라서, 매제를 투과시키는 생지의 캔버스나 엷게 아교만 바른 캔버스를 사용하는 화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목재에 비닐 테이핑을 하는 등의 꼼수를 사용해야 한다.
황당한 점은, 국내 유명 화가들을 위해 캔버스를 제작해온 화방의 경우에도, 목재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몇몇이 나서서 함께 스트레처용 목재를 수입하고, 건조 창고가 운영될 수 있도록 공생을 도모했다면, 진작에 간단히 해결됐을 문제지만, 거의 아무도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누가 더 물성을 제대로 탐구한 수행의 화가인지, 명명백백하게 판별할 수 있을 터.
수업 시간에 이우환 전시를 보러오라고 한 뒤, 캔버스가 어떻게 구축돼 있더냐고 질문하면, 회화전공자라고 해도 답을 제대로 하는 이는 지금까지 0명 봤다. (그 정도 관찰력으로 그림을 그리시겠다? 정말?) ///
추신) 지지체의 최적화는 화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각가에게도, 설치미술가에게도, 뉴미디어 작가에게도, 매체적 지지체와 개념적 지지체의 최적화는 필수다. (지지체로서의 관객을 최적화하는 작업은 드물다.)
*나중에 시간이 허락하면 지지체에 대한 글을 따로 써보고자 한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또 다시 한국으로의 여정. 어깨통증으로 작업을 거의 못했던 1년.
늘 바닥부터 시작하던 적응기만 3년.

미미생물과 미미밈은 작가의 2가지 라인이다. 중간계라고 상정한 작품세계 속의 불완전한 완전체들 표방한 캐릭터로 작가 자신이자 무엇이든 착종될 가능성을 가진 생명체이다.

– 작가의 여성캐릭터를 많이들 물어본다. 작가 본인이냐고.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하고 결국은 우리라며 어쩌면 얼버무리는 식으로 맞기도하고 틀리기도 한 대답을 한다.

첫번째 개인전을 한국에서 치르고 그 해 중국으로 떠났다. 두번째 개인전을 치르고는 일본으로 떠났다.

9월에 개인전을 잡았지만 아직까지 받아본 적 없는 지원금을 받고 8월에 인천에서 인천의 산업화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치뤘다. 9월 개인전에 힘을 실어 하나의 시리즈로 밀어부칠 생각이었으나 나는 지원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덕분에 시리즈 작업은 못했어도 풍성한 작업들을 선보일 수 있었고 개인의 문제에 천착했던 시기를 지나 인천에서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봤다.

난 늘 중간이다. 어디에도 껴있고 어디에도 없다. 현재도 미디어(라고 말하는 계열)과 팝아트 어딘가에 껴있고(별 의미는 없지만 확실히 만나는 작가들은 다르다)

이번 서문에서는 작가 개인적 삶의 궤적적 측면 강조.
작가가 결정할 수 없는 수 많은 이벤트들을 통과하며 그 사이사이에서 작업을 하게 되고 그것은 작품에 담기게 된다.

작업은 큰 테마안에서 작은 소주제들을 가지고 진행되며 발전하는듯 제자리인듯 하지만 이번 전시는 그것보다는 작가의 삶의 궤적을 느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각자 달라보이지만 나름의 세계관 안에서 각각의 또 다른 소우주를 형성하며 그 안의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하나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재미를 느끼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 작업의 전체적 맥락 + 작가의 일상

– 미미밈(Memememe):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
밈(meme):영국의 생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가 1976년 출간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만들어 낸 용어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문화의 전달은 유전자(gene)의 전달처럼 진화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언어·옷·관습·의식·건축 등과 같은 문화요소의 진화는 유전자의 진화방식과는 다르다. 따라서 문화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복제되는 것과 같은 복제기능이 있어야 한다. 즉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에 기생하는 것과 같이 문화의 전달에도 문화의 복제 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물, 곧 중간 숙주가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단위·양식·유형·요소가 바로 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밈 [meme] (두산백과)

언제나 듣는 질문, 이 캐릭터 작가님이세요? 닮았어요. 보통 객관화시키고 거리를 두지 못하고 거시적으로 보지 못함이 부끄러워 뜨뜨미지근하게 저에게 시작되었긴 하지만 당신일수도 인류를 대표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캐릭터 이름이 뭐냐고 물어도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익명의 누구든을 대표할 수 있게. 하지만 아무리 벗어나려해도 나에게서 시작되었고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캐릭터에 이제는 이름을 지어주기로 한다. 미미밈. 나를 뜻하는 me와 밈(문화복제 매개물)을 뜻하는 meme을 조합해 me가 4개나 들어간 memememem 그렇게 벗어나려는 나로의 회기이자 근원을 찾아 뻣어나가 보려는 의지.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동네의 풍경들. 노동과 휴식 사이의 산보,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길 위에서 영감은 피어오른다.
열지어선 아파트, 누군가의 집 창문 위로 미풍에 흔들리는 잎새,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번지는 구름 낀 하늘, 한편으로 기울어진 무지개. 온종일 농땡이를 피우는 고양이가 수풀 사이에서 기지개를 켠다. 이 순간 살아있는 것들, 그리하여 언젠가는 사라져 갈, 시선이 머무는 것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을 한바탕 휘저어 놓은 듯, 작업실에서의 노동의 여운이 몸속에서 맴을 돈다. 그러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일정하게 반복되는 발소리와 함께 길 위의 풍경은 리드미컬하게 흘러간다. 어느새 가벼워진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처럼 휴식과 위안이 깃든다. 그리하여 이 저녁, 스스로를 향해 건네는 인사. 아, 오늘의 작업은 즐거웠다. 안녕, 나의 하루.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집과 작업실 사이의 동네 풍경들을 작가의 상상과 사색을 담아 작업하였다. ‘산보’라는 목적 없는 행위 속에서, 의식은 시선을 따라 자유롭게 가 닿는다. 생활 속의 익숙한 풍경들을 상상의 요소들과 결합해 팝적인 캐릭터와 다양한 미디어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풍경화를 제시하려 한다.
기존 작업이 빛과 어둠, 옳고 그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여정을 그렸다면, 이번 전시는 천진함과 가벼움을 전면에 배치하여 유희적인 상상력을 펼쳐놓았다. 이 즐거운 상상의 여정 끝에서 무언가 안식과 위로를 느꼈다면, 그것은 이것이 ‘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공간적인 방향이 작업실이 아닌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바쁘거나 분투하거나 고되었거나, 어쨌든 그 하루의 끝에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과 일터 사이의 모든 행보 가운데 휴식과 위안이 깃들기를, 오늘의 찬란한 생명의 풍경을 놓치지 않기를. 매일 수고하는 모든 이들의 삶이 집으로 향하는 걸음처럼 가볍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홍몽(鴻濛)은 우주가 형성되기 이전의 하늘과 땅이 아직 미분리된 카오스(chaos), 혼돈 상태로 천지가 개벽할 무렵의 세계다. 중국의 고전 ‘장자’와 ‘산해경’에서 묘사하는 혼돈(渾沌)은 두루뭉술한 주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날개가 있기도 하나 얼굴 모습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미미밈 발아 자세’에서의 미미밈의 얼굴 없음은 이러한 혼돈, 홍몽과 닮아 있다. 이것은 그녀도, 그도 아닌 아직 미완의 생명으로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미미밈 캐릭터와 미미생물들의 원형이다. 조용히 합장한 채 기를 응축하고 있는 미미밈은 생물과 미생물의 중간체이며 작가의 자아가 담겨 있는 씨앗으로 발아 순간을 맞이하려 한다.

이번 개인전의 가장 큰 변화는 세계관의 확대다. 작가의 주요 기조였던 ‘관계성이 결여된 개인적 세계’에서 시작하여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들이 교차되고 충돌해 흡수되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닮기도 하고 전혀 다른 소우주들을 아우르기 위해 ‘유니버스’라고 칭하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3D 가상공간, 조각상, 공기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작품이 모여 있어 흡사 박람회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동안 축적해온 오브젝트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다양한 콘셉트와 방법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변화와 확대는 그간에 있었던 작가 개인의 족적과 무관하지 않다. ‘초임계유체’전 이후 지난 4년의 기간은 작가로서 그 어느 때 보다 다사다난하고 치열했던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비슷하지만 낯선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현실이 괴리되고 분절되는 경험을 한다. 한국에 돌아와 복귀하기까지의 녹록지 않았던 시간이 더해지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하던 작가는 타인과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전통적인 이미지들은 한, 중, 일 동북아시아 문화에 대한 체험과 고민으로 심화되었고, 여기에 인터렉티브 테크놀로지가 더해졌다.

‘희붐한 춤사위’의 경우, 360도 VR(Virtual Reality) 공간에서 펼쳐지는 게임 형식의 인터렉티브 3D 작품이다. 죽음의 춤이라는 일본의 부토(舞踏)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미미밈의 모션은 일본의 무용가 金景雲(Kim Keiun)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그의 안무를 3D 프로그램에서 리깅 작업으로 완성한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짓던 신의 손가락처럼, 가상의 존재는 손으로만 표현되며 플레이어의 터치에 따라 각기 다른 작품이 된다. 별사탕들과 함께 널브러져 잠든 듯, 혹은 아직 생명이 없는듯한 미미밈을 플레이어가 ‘손’으로 터치하면 미미밈은 깨어나 각자의 변화된 형상을 보이면서 춤을 추다가 다시 쓰러져 잠이 든다. 제목 그대로 희미한 몸짓으로 찰나의 생명을 누리다가 이내 사그라진다. 생명과 반생명의 긴장감이 존재하고 있는 그의 춤이 죽음의 춤인지 생명의 춤인지 역시나 ‘희붐’하기만 하다.

조세민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개체나 세계 안에서 여러 다면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 전면을 장식하는 귀엽고 재미있는 이미지들과 함께 우울과 불안, 어둠과 공포, 죽음의 표상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너와 나, 옳고 그름, 빛과 어둠의 경계를 흐린 ‘홍몽’의 시공으로부터 출발하여 전통과 미래, 일상과 일탈, 삶과 죽음, 우울과 광기, 귀여움과 그로테스크, 퇴폐와 성스러움을 압축한 현란한 오브젝트들의 조합과 패턴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경한 조합을 통해 일상의 관념과 의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우주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홍몽의 세계로부터 다양한 향연이 펼쳐지는 유니버스를 오가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덧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세계와 생명들을 향한 작가의 심심한 위로와 웃음, 그리고 재기발랄한 독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심경 복잡한 표정의 이 악수를 마주 잡아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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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의 육성과 거리 두기
고백이라는 제도: 권력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진정한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 형식이 내용을 대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의 제도화 – 장례식장, 곡소리
 고백: 진실의 판단보다 진실되게 느껴지게끔 하는 기술이 중요해짐.
마이너리티, 소수성

2. 고백 말고 다른 어떤 것을
미셸 푸코
“개인은 오랫동안 다른 이들의 신원보증과 타인과의 유대(가족, 국적, 후원자)에 대한 표명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아 왔으나, 그 다음에는 그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수 있거나 말해야 하는 진실의 담론을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진실의 고백이 권력에 의한 개체화 절차의 핵심에 자리잡은 것이다.”(『성의 역사1』, 76쪽)
“서양에서, 사람은 고백의 동물이 되었다. 거기에서 아마 문학상의 변모가 유래했을 것이다. 용기 또는 거룩함의 시련을 중심으로 한 영웅담 또는 초자연적인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던 이야기하고 듣는 쾌락에서, 고백이라는 형식 자체에 의해 어른거리는 신기루처럼 제시될 뿐인 진실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말들 사이로 떠오르게 하려는 한없는 노력에 따라 규제되는 문학으로 이행된 것이다.”(같은 책, 77쪽)

기담(a strange story)
이방인 낯선 사람 스트레인저
현실에서 괴리, 소외. 무리짖기
외국생활의 낯설음, 얼굴이 같으나 다른 언어, 얼굴이 다르나 같은 언어,
생각해보면 조국에서라고 못 느꼈을 것이냐.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제1의적으로는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그 집단에 고유한 ‘문화 유형’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방인이 사회학적 탐구의 테마가 되는 것은 특히 그가 자신이 접근하는 집단에 영속적으로 수용되고자 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용인되고자 하는 경우이다. 그 경우에 이방인은 해당 집단에 고유한 문화의 유형을 공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유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그 집단의 내부에 있는 자도 외부에 있는 자도 아니며, 바로 그 경계에 있는 자(marginal man)로서 특징지어지게 된다.

그러한 경계인을 방랑과 정착의 통일 내지 근접과 원격의 통일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묘사한 이가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인데, A. 슈츠는 짐멜의 그러한 견해를 이어받는 한편, 좀 더 나아가 그것을 미국 사회학의 식견들을 가지고서 보강하면서 문화의 유형에 관한 지식의 모양을 축으로 하여 상세한 논의를 전개한다. 이방인을 주제화하는 것의 의의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로부터 결과하는 특유한 태도에 놓여 있다.

요컨대 그 태도란 집단 구성원이 스스로의 사회 집단에 고유한 문화의 유형을 자명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데 반해, 이방인은 그것이 형성되어온 생생한 역사적 전통에 관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어디까지나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그 객관성은 반대로 스스로가 그때까지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던 자신의 고향 집단에 고유한 문화 유형도 회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게 한다고 하는, 필연적으로 ‘위기’에 직면하는 이방인의 태동이다. 이러한 태도는 또한 사회과학자의 경험적 연구 방식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나스 히사시(那須 壽)
[네이버 지식백과] 이방인 [異邦人, stranger] (현상학사전, 2011.12.24, 도서출판 b)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 왜 모두들 이방인 대하듯 날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거요?
• 자기는 이방인이니까 다른 나라의 풍속이나 물정을 모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잖느냐 하는 태도요…. 출처 : 김동리, 사반의 십자가
2 .< 기독교> 유대 인이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여러 민족을 얕잡아 이르던 말. [비슷한 말] 이국인.
외인, 외국인

막막한 언저리 생활
또다른 이방인, 북망명자
주변인, 경계인, 한계인 / medium과 맞닿아있다.
경계인(境界人)( (marginal man)이란 오랫동안 소속됐던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으로 옮겼을 때, 원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금방 버릴 수 없고, 새로운 집단에도 충분히 적응되지 않아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사람을 말한다.

이 말은 나치즘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한 쿠르트 레빈(K. Lewin, 1890∼1947)이 사용한 심리학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발표된 최인훈씨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경계인으로 묘사되면서부터이다.

재독 사회학자인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저서 < 경계인의 사색>에서 자신을 ‘경계의 이쪽에도, 저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 경계인’으로 규정했다.

이제 지구상에서 단일민족국가라 불릴만한 곳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세계화와 각종 문화의 혼재 속에서 전통적 가치관과 자아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몇 년간의 외국 생활로 공식적인 경계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세상 어딜 가나 도시는 비슷한 모양이건만 현실감이 현격히 떨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국에서도 이방인이 되어간다. 가족, 국적에서 비롯된 유대관계와 신원보증이 느슨해지며 나의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일까. 혼란과 두려움이라는 행간 사이에서 종종 새로운 두근거림을 만나곤 한다. 타인, 이방인, 낯선 이가 꼭 고독과 소외의 아이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현실은 새로운 판타지가 된다. 하루하루가 모험이고 도전이 된다. 거리두기의 미학을 발견한다.
생각해 보면 이런 경계인의 삶은 타지에서만의 경험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생경함과 낯섦 속에서 서로가 끝끝내 이해되지 못할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혼란과 소외감과 고독… 그것이 혼란이고 두려움일 수도 있지만 기존 세계의 통쾌한 전복이고 새로이 도래할 세계에 대한 기대나 즐거움일 수도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나는 이런 이방인, 경계자의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모두가 이방인이고 방랑하는 세계. 나의 작품은 늘 ‘우리는 여전히 괜찮을 거야’는 인식과 믿음에서 출발한다. (오랜 역사와 변혁 속에서 결국에 살아남았던 인류의 잠재력을 근거로 삼아)
작품에서 세계의 다양한 언어, 인종, 문화, 전통과 첨단을 다양한 캐릭터와 상징적 언어를 그려내고자 한다. 다정하고 익살스러운 판타지는 크로테스크하고 생경한 현실에의 괴리감을 완화시켜준다.
전통회화의 요소를 가지고 게임 속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며, 현재와 과거, 미래가 혼재되어 있고, 한국, 중국, 일본의 세계가 뒤섞여있는 세계다. 일상과 일탈,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전통과 첨단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유희적으로 오갈 것이다.
진지한 질문에서 시작되는 다소 무거운 삶의 의문들을 작품의 유희를 통하여 무게를 덜어내어 결국 만만한 것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유희적인 상상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덜고 새로운 삶을 견지 할 수 있는 힘과 시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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