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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 회색분자>가 왜 나쁜지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흔히 ‘줏대 없는 놈’정도로 생각하는 회색이 어째 그런 취급을 받는지 의문스럽다. 자신의 위치 혹은 사상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을 비유하는, 그리하여 마치 ‘박쥐’와 같이 대상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색. 이 시점에서 한번 물음을 던진다. 검정이든 흰색이든 당신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고. 절대적 확신은 어느 곳에서 나오느냐고. 그녀는 어떠한 결론도 지양하며 검정과 흰색 사이의 회색 위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은 중간의 것, 매체, 도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각의 캔버스 안에는 현재와 과거, 미래가 혼재되어 있고, 한국, 중국, 일본의 세계가 뒤섞여있다. 등장인물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고양이는 일상과 일탈,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전통과 첨단을 뒤흔들며 춤을 춘다. 얼핏 대칭인 것 같지만 사실 대칭이 아닌 화면구성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은밀히 무너트렸다. 이렇듯 작품 속 각각의 요소들은 미디엄을 담는 미디엄으로써 중간계를 표방한다.

2011년경부터 시작된 ‘어썸패밀리’ 시리즈는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고양이 두 마리의 일상에서부터 출발한다. 삶의 일상적 영역 안에서도 수없이 분열하고 팽창하는 우주의 이야기를 담았다. 초기작 < 즐거운 우리집-욕실에서>에는 귀여운 얼굴의 부부와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등장한다. 몸을 담그고 있는 욕조는 알고보니 핏빛으로 가득하다. 큐트한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함을 섞은 화면은 가정이라는 것이 온전히 화목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것은 아님은 보여준다.

이후 < 장군님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흑백고양이를 탄 장군도>, < 축복 시전해 드립니다-흑백고양이와 산신도>등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은 전통회화의 요소를 가지고 게임 속 판타지와 현실을 넘나들며, 이는 근작 < 인생가마>로 넘어오며 보다 다양한 내용을 담기시작한다. 작품 중심부에 위치한 가마는 사람이 숨이 끊어졌을 때 장지까지 타고 가게 되는 꽃상여로, 그 안에는 살아 있는 여자아이가 있다. 이를 현대의 장난감 블럭인 레고가 전통의상을 입고 호위하며, 페달이 달린오토바이 토모스의 바퀴가 가마를 움직인다. 바탕엔 무한한 우주가 펼쳐져 있어 공간의 시점이 모호하고 공간 위에 떠 있는 옥춘사탕이 해와 달을 대신한다. 주인공 여자아이가 어디로 가는지 어떠한 상황인지 정확한 유추를 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목적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모순을 인정하고 소소한 재미를 찾아내는 것이 작품의 주된 목소리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 가지 결론이나 한 가지 이야기를 지양하고, 여러 요소를 뒤섞어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관찰해 보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놀이이다. 어떠한 것을 보고 무언가를 확신하며 마침표를 찍는 것만이 온전한 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뒤엉킨 현상을 관조하여 담아냄이 더 자연스러운 답이 될 때도 있으니 말이다. 때로는 불완전한 것이 더 큰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첫 개인전인 이번 전을 통해 중간의 것들이 만들어 낸 우주를 공유하고자 한다. 좋지도 나쁘지도,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회색의 길 위에서 그녀가 말을 건넨다. 중간정도의 깊이감으로 유랑하는 세상은 그것으로 즐겁고 흥미롭다고.

1.태초에는 단순함만이 존재했다. 보이지도 않았을 그 어떤 우연한 충돌이 유기물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왕성한 복제자가 멈추지 않고 번식과 진화를 반복한 끝에 지금의 세계가 생겨났다. 까마득히 먼 곳으로부터 지금 여기까지, 또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세계를 쉼 없이 창조해가는 원동력을 유전자의 생존본능이라고 할 때, 이 세계의 질서는 우연과 자연 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DNA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세계를 의지대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을 욕망하는 자들이 한다.

조세민의 작품을 아우르는 첫인상은 ‘불멸의 유전자’였다. 우리 몸의 어느 세포 혹은 세계를 이루는 그 어떤 물질을 숙주로 하여 끊임없이 진화해가며 생명을 전달하는 불멸의 유전자. 생명은 그 자체로서 온전하다. 그 어떤 의미나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진보나 쇠락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고 하는『도덕경』(노자)의 구절과 상통한다.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이 자연스러움을 따를 뿐이다. 기(氣)의 운집과 흩어짐으로 순환 우주를 이해하는 동양적 세계관에서도 만물은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죽을 뿐, 사랑해서 살고 미워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조세민의 작품 속에 일관되게 그려지는 세계관이다. 생경한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현실과 판타지, 삶과 죽음, 영혼과 물질, 문명과 야만, 일상과 일탈, 무기력과 광기, 전체와 부분, 몰락과 구원의 경계를 지우고, 진위, 선악, 미추, 승패, 불쾌와 쾌의 영역을 넘어 판단의 비무장지대, 세계의 틈새를 구축한다. 그곳은 일상의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무중력 상태로 춤을 출 수 있는 비눗방울 속 같은 곳이다. 그 안에서 무중력 댄스를 추며 축제를 벌이면 그것은 제의에 가깝다. 자신의 우주에서 원초적 미분리 상태가 된 비로소 오롯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 태어난다. 숨쉬기가 편해진다. 흥이 돋으면 다시 경계를 밀고 나아간다. 존재하는 생명의 수만큼 저마다의 비눗방울이 무한한 거품으로 일어 우주를 가득 메우면 비눗방울의 수만큼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더 똑똑해지고 열심히 살아갈수록 짙어지는 슬픔처럼 우리는 ‘나’로서 살아가려 할수록 ‘나’와 멀어진다. 사회는 거대한 합리적 시스템의 공동체로 권력 사회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시스템에서 소외된 개인은 톱니바퀴의 한 부품이 되어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정작 무엇을 먹고 싶은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인간(실제)을 추구하던 끝에 시스템(가상)만 남았다. 이런 시스템의 공동체가 생산하는 희망이 오히려 판타지라고 말하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주술적 공간을 창조했다. 360° VR 게임 형식의 인터랙티브 3D 작품인「판토맷 우주방」은 말하자면 비눗방울 속 우주이다. 자연물보다 인공물에 익숙하고 현실보다 가상의 세계에서 놀았던 게임 1세대로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작업의 영역을 넓혀가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휴대폰이 장착된 3D 안경을 끼고 관람자가 고개를 움직여 시작 버튼에 시선을 꽂으면 디지털 사운드와 함께 판토맷 우주방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관람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판토맷 우주방 안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360도 전 방향에서 관람할 수 있다. 열어놓은 축제와 제의의 공간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하며 관람자는 자신의 우주를 열 수 있는 단서를 얻는다.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불필요한 시대에 가상을 본질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감수성은 건강성을 잃고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상현실(Vertual Reality)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상의 논리가 현실에 적용되고 현실세계가 가상의 도움을 받아 더욱 실재적으로 보이는,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Real Vertuality의 시대인 것이다. 조세민의 초기 작품부터 등장하는 줄무늬고양이는 10년째 키우고 있는 고양이이다. 고양이처럼 도도하면서도 다정하고 영리한가 싶으면 멍청하고 호랑이같이 용맹하면서 최고의 겁쟁이인 동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요물이라 불리며 공포와 사랑의 대상이었다.그러한 고양이의 양면성에서 삶의 모순을 포착하고 삶과 죽음, 일상과 일탈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판토맷 우주방」에 풀어 놓고 뛰어놀게 했다. 키우는 고양이는 반려동물로써 마음의 안녕과 창작의 영감을 주는 동시에, 작품 속 고양이 또한 작품이 존재하는 장소는 물론 그 어떤 가상의 공간에서도 현실의 고양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작가의 줄무늬고양이처럼, 조세민의 작품 속 오브젝트들은 부적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스스로를 지키라고 다독여준다.

인간이 지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유아론(唯我論)에서 이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인류 또한 원생 박테리아들이 지구에 번창하던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복잡한 생물체의 하나이다. 테크놀로지가 지닌 자기 파괴적 운명처럼, 진화는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와 상관없는 일종의 통제 불가능한 불멸의 유전자이다. 인간종에 대한 환상이나 의미 부여의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개별적 인간의 삶은 좀 더 재미있어질 수 있다. 동물들은 죽음 없는 삶을 열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죽음 없는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당첨된 유전자로 일어난 나의 생명현상이 종결될 때까지 그저 혼돈의 우주를 유영하면 된다.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되, 시스템이 제공하는 희망이나 진보의 환상을 쫓는데 나의 삶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지 않는다. 사물에게서 온다. 돌 하나에도 복을 빌고 물 한 사발에 정성을 바치던 기복 신앙은, 첨단이라 여기는 테크놀로지 사회가 될수록 아마도 우리 내면이 더욱 요구하고 있는 정서일 것이다. 본다는 것은 보여진다는 것이다. 초임계(超臨界) 상태에 도달한 세계를 보는 자는 비로소 보여지게 되는 자신의 우주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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