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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길 위에서 마주하는 동네의 풍경들. 노동과 휴식 사이의 산보, 매일 마주하는 일상의 길 위에서 영감은 피어오른다.
열지어선 아파트, 누군가의 집 창문 위로 미풍에 흔들리는 잎새,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 번지는 구름 낀 하늘, 한편으로 기울어진 무지개. 온종일 농땡이를 피우는 고양이가 수풀 사이에서 기지개를 켠다. 이 순간 살아있는 것들, 그리하여 언젠가는 사라져 갈, 시선이 머무는 것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을 한바탕 휘저어 놓은 듯, 작업실에서의 노동의 여운이 몸속에서 맴을 돈다. 그러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일정하게 반복되는 발소리와 함께 길 위의 풍경은 리드미컬하게 흘러간다. 어느새 가벼워진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처럼 휴식과 위안이 깃든다. 그리하여 이 저녁, 스스로를 향해 건네는 인사. 아, 오늘의 작업은 즐거웠다. 안녕, 나의 하루.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집과 작업실 사이의 동네 풍경들을 작가의 상상과 사색을 담아 작업하였다. ‘산보’라는 목적 없는 행위 속에서, 의식은 시선을 따라 자유롭게 가 닿는다. 생활 속의 익숙한 풍경들을 상상의 요소들과 결합해 팝적인 캐릭터와 다양한 미디어로 재구성하여 새로운 풍경화를 제시하려 한다.
기존 작업이 빛과 어둠, 옳고 그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여정을 그렸다면, 이번 전시는 천진함과 가벼움을 전면에 배치하여 유희적인 상상력을 펼쳐놓았다. 이 즐거운 상상의 여정 끝에서 무언가 안식과 위로를 느꼈다면, 그것은 이것이 ‘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공간적인 방향이 작업실이 아닌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바쁘거나 분투하거나 고되었거나, 어쨌든 그 하루의 끝에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과 일터 사이의 모든 행보 가운데 휴식과 위안이 깃들기를, 오늘의 찬란한 생명의 풍경을 놓치지 않기를. 매일 수고하는 모든 이들의 삶이 집으로 향하는 걸음처럼 가볍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

홍몽(鴻濛)은 우주가 형성되기 이전의 하늘과 땅이 아직 미분리된 카오스(chaos), 혼돈 상태로 천지가 개벽할 무렵의 세계다. 중국의 고전 ‘장자’와 ‘산해경’에서 묘사하는 혼돈(渾沌)은 두루뭉술한 주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날개가 있기도 하나 얼굴 모습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미미밈 발아 자세’에서의 미미밈의 얼굴 없음은 이러한 혼돈, 홍몽과 닮아 있다. 이것은 그녀도, 그도 아닌 아직 미완의 생명으로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미미밈 캐릭터와 미미생물들의 원형이다. 조용히 합장한 채 기를 응축하고 있는 미미밈은 생물과 미생물의 중간체이며 작가의 자아가 담겨 있는 씨앗으로 발아 순간을 맞이하려 한다.

이번 개인전의 가장 큰 변화는 세계관의 확대다. 작가의 주요 기조였던 ‘관계성이 결여된 개인적 세계’에서 시작하여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들이 교차되고 충돌해 흡수되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닮기도 하고 전혀 다른 소우주들을 아우르기 위해 ‘유니버스’라고 칭하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3D 가상공간, 조각상, 공기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작품이 모여 있어 흡사 박람회장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동안 축적해온 오브젝트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다양한 콘셉트와 방법으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변화와 확대는 그간에 있었던 작가 개인의 족적과 무관하지 않다. ‘초임계유체’전 이후 지난 4년의 기간은 작가로서 그 어느 때 보다 다사다난하고 치열했던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비슷하지만 낯선 문화와 언어에 적응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현실이 괴리되고 분절되는 경험을 한다. 한국에 돌아와 복귀하기까지의 녹록지 않았던 시간이 더해지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를 구축하던 작가는 타인과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전통적인 이미지들은 한, 중, 일 동북아시아 문화에 대한 체험과 고민으로 심화되었고, 여기에 인터렉티브 테크놀로지가 더해졌다.

‘희붐한 춤사위’의 경우, 360도 VR(Virtual Reality) 공간에서 펼쳐지는 게임 형식의 인터렉티브 3D 작품이다. 죽음의 춤이라는 일본의 부토(舞踏)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미미밈의 모션은 일본의 무용가 金景雲(Kim Keiun)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그의 안무를 3D 프로그램에서 리깅 작업으로 완성한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짓던 신의 손가락처럼, 가상의 우주 공간 속 플레이어의 존재는 손으로만 표현되며 플레이어의 터치에 따라 각기 다른 작품이 된다. 거대 우주 속 소행성에서 별사탕들과 함께 널브러져 잠든 듯, 혹은 아직 생명이 없는듯한 미미밈을 플레이어가 ‘손’으로 터치하면 미미밈은 깨어나 각자의 변화된 형상을 보이면서 춤을 추다가 다시 쓰러져 잠이 든다. 제목 그대로 희미한 몸짓으로 찰나의 생명을 누리다가 이내 사그라진다. 생명과 반생명의 긴장감이 존재하고 있는 그의 춤이 죽음의 춤인지 생명의 춤인지 역시나 ‘희붐’하기만 하다.

조세민 작가의 작품은 하나의 개체나 세계 안에서 여러 다면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 전면을 장식하는 귀엽고 재미있는 이미지들과 함께 우울과 불안, 어둠과 공포, 죽음의 표상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너와 나, 옳고 그름, 빛과 어둠의 경계를 흐린 ‘홍몽’의 시공으로부터 출발하여 전통과 미래, 일상과 일탈, 삶과 죽음, 우울과 광기, 귀여움과 그로테스크, 퇴폐와 성스러움을 압축한 현란한 오브젝트들의 조합과 패턴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경한 조합을 통해 일상의 관념과 의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우주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제시하고 있다.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홍몽의 세계로부터 다양한 향연이 펼쳐지는 유니버스를 오가는 여정 속에서, 우리는 덧없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세계와 생명들을 향한 작가의 심심한 위로와 웃음, 그리고 재기발랄한 독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심경 복잡한 표정의 이 악수를 마주 잡아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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