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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는 단순함만이 존재했다.

보이지도 않았을 그 어떤 우연한 충돌이 유기물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왕성한 복제자가 멈추지 않고 번식과 진화를 반복한 끝에 지금의 세계가 생겨났다.

까마득히 먼 곳으로부터 지금 여기까지, 또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세계를 쉼 없이 창조해가는 원동력을 유전자의 생존본능이라고 할 때, 이 세계의 질서는 우연과 자연선택에 의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DNA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세계를 의지대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을 욕망하는 자들이 한다.

조세민의 작품을 아우르는 첫인상은 ‘불멸의 유전자’였다. 우리 몸의 어느 세포 혹은 세계를 이루는 그 어떤 물질을 숙주로 하여 끊임없이 진화해가며 생명을 전달하는 불멸의 유전자.

생명은 그 자체로서 온전하다. 그 어떤 의미나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진보나 쇠락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이 여긴다.’고 하는 < 도덕경>(노자)의 구절과 상통한다.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이 자연스러움을 따를 뿐이다. 기(氣)의 운집과 흩어짐으로 순환 우주를 이해하는 동양적 세계관에서도 만물은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죽을 뿐, 사랑해서 살고 미워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조세민의 작품 속에 일관되게 그려지는 세계관이다.

작가는 생경한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현실과 판타지, 삶과 죽음, 영혼과 물질, 문명과 야만, 일상과 일탈, 무기력과 광기, 전체와 부분, 몰락과 구원의 경계를 지우고, 진위, 선악, 미추, 승패, 불쾌와 쾌의 영역을 넘어 판단의 비무장지대, 세계의 틈새를 구축한다.

그곳은 일상의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무중력 상태로 춤을 출 수 있는 비눗방울 속 같은 곳이다. 그 안에서 무중력댄스를 추며 축제를 벌이면 그것은 제의에 가깝다. 자신의 우주에서 원초적 미분리 상태가 된 작가는 비로소 오롯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 태어난다. 숨쉬기가 편해진다. 흥이 돋으면 다시 경계를 밀고 나아간다. 존재하는 생명의 수만큼 저마다의 비눗방울이 무한한 거품으로 일어 우주를 가득 메우면 비눗방울의 수만큼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2.

조세민은 이번 개인전 ‘초임계유체’에서 어질지 않은 우주와 분절적 자아의 관계에서 오는 삶의 모순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구원은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는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작가는 자신이 구축한 무중력 안전지대에 토템과 애니미즘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들과 동북아 전통문화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차용해 혼돈의 세계를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초임계유체’란 일정한 고온과 고압의 한계를 넘어선 상태에 도달하여 액체와 기체를 구별할 수 없는 시점의 유체를 가리킨다. 용매로서 화학반응에 유용하여, 혼합물에서 특정 성분을 추출, 분리하거나 독성물질을 분해하는 데에 사용된다. 작가는 이미지들의 조화와 충돌을 통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세계를 열어 놓고, 인간종의 과잉된 자의식을 분해하고 낯선 심미적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삶에 작은 위안과 재미를 선사한다.

작품 속 큐트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오브젝트들과 환상적인 총천연색 패턴들의 충돌은 한 입 베어 물면 머리가 쭈뼛해질 정도로 아찔하게 단 음식을 먹은 것처럼 뇌를 유연하게 해준다. 인간의 인식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분절적이며 단편적 감각의 꾸러미이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편이 좀 더 자연스럽다.

그에 대조적으로 한없이 검은,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의 머리카락은 화면에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중심을 잡아주고, 가시적 형상 이면에 깔린 단단한 사유의 깊이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검은 머리카락은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명현상의 상징이자, 그 덩어리 자체가 촉수를 세워 세상과 소통하는 꿈틀거리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태고의 단순함과 무한한 우주 에너지가 운집된 머리카락 덩어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자라나지만, 언제든 주체에 의해 잘려버릴 수도 있다.

작가는 실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 판토맷 우주방>(인터랙티브 3D, 2015)에 등장한 조형물에 상징적으로 사용했다. 토템을 떠올리게 하는 이 조형물은 작가 자신이 자신의 우주의 주체라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모든 생명은 스스로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곧 무한대로 확장하는 우주공간과 비눗방울 하나에 들어 있는 우주가 다르지 않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3.

더 똑똑해지고 열심히 살아갈수록 짙어지는 슬픔처럼 우리는 ‘나’로서 살아가려 할수록 ‘나’와 멀어진다. 사회는 거대한 합리적 시스템의 공동체로 권력 사회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시스템에서 소외된 개인은 톱니바퀴의 한 부품이 되어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정작 무엇을 먹고 싶은지 모른다.

우리 사회는 인간(실제)을 추구하던 끝에 시스템(가상)만 남았다. 이런 시스템의 공동체가 생산하는 희망이 오히려 판타지라고 말하는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주술적 공간을 창조했다.

360° VR 게임 형식의 인터랙티브 3D 작품인 < 판토맷 우주방>은 말하자면 작가의 비눗방울 속 우주이다. 자연물보다 인공물에 익숙하고 현실보다 가상의 세계에서 놀았던 게임 1세대로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작업의 영역을 넓혀가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휴대폰이 장착된 3D 안경을 끼고 관람자가 고개를 움직여 시작 버튼에 시선을 꽂으면 디지털 사운드와 함께 판토맷 우주방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관람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판토맷 우주방 안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360도 전 방향에서 관람할 수 있다. 작가가 열어놓은 축제와 제의의 공간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하며 관람자는 자신의 우주를 열 수 있는 단서를 얻는다.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불필요한 시대에 가상을 본질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감수성은 건강성을 잃고 퇴행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상현실 (Vertual Reality)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상의 논리가 현실에 적용되고 현실세계가 가상의 도움을 받아 더욱 실재적으로 보이는,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Real Vertuality의 시대인 것이다.

조세민의 초기 작품부터 등장하는 줄무늬고양이는 작가가 10년째 키우고 있는 고양이이다. 고양이처럼 도도하면서도 다정하고 영리한가 싶으면 멍청하고 호랑이같이 용맹하면서 최고의 겁쟁이인 동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요물이라 불리며 공포와 사랑의 대상이었다. 작가는 그러한 고양이의 양면성에서 삶의 모순을 포착하고 삶과 죽음, 일상과 일탈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 판토맷 우주방>에 풀어 놓고 뛰어놀게 했다. 작가가 키우는 고양이는 반려동물로써 마음의 안녕과 창작의 영감을 주는 동시에, 작품 속 고양이 또한 작품이 존재하는 장소는 물론 그 어떤 가상의 공간에서도 현실의 고양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작가의 줄무늬고양이처럼, 조세민의 작품 속 오브젝트들은 부적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스스로를 지키라고 다독여준다.

< 시발의 이브 I>(디지털 프린트, 2015)은 선악과를 먹고 유토피아에서 추방당한 이브가 신으로부터 스스로 독립하는 시발(始發)의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자신의 갈비뼈를 내어줌으로써 선악의 구분이라는 형벌을 반납하고 원초적 미분리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선악 미추의 모든 경계를 지우고 스스로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브는 우리가 추방시키려 하면 할수록 되돌아온다. 끊임없이 추방시키려 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것. 그것을 응시하는 데에서 구원은 온다.

< 시발의 이브 II>(디지털 프린트, 2015)는 조세민 작가가 현재 거주 중인 중국 상해를 배경으로 한 3M 길이의 메인 작품이다. 유토피아에서 흐를 듯한 아름다운 물결 속에서도 돼지는 익사 중이고, 지옥불에서도 생명을 상징하는 물고기들이 유영한다. 물결 뒤로 보이는 사후세계에 발 딛고선 시발(始發)의 이브는 동방명주를 잡고 희구(喜懼)의 멜로디를 연주한다. 기쁨과 두려움은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작가에게 이방인의 시선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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